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월 항쟁 (문단 편집) === 항쟁의 진행 === > 서울이 심합니다. 광주는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 - 6월 13일, 대통령 주재 관계기관 대책회의.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 [[고건]] > 6월 11, 12일은 데모가 가속화하다가 13일은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월요일(15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데모에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 - 6월 14일, 대통령 주재 비상대책회의. 내무부 장관 [[고건]][* 출처: 이윤섭, <한국을 뒤흔든 10일 - 6월 항쟁>.(이북스펍). 2013] 6월 10일의 대규모 시위로 일순 긴장 상태가 이어졌지만 13일~14일의 주말이 찾아오면서 시위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고, 가장 우려했던 [[광주광역시|광주]]가 대학생보다는 광주 종교계 쪽이 주도를 했다. [[기독교]]인 [[가톨릭|천주교]], [[개신교]]는 물론이고 [[10.27 법난]]으로 정권에 비교적 순응적이었던 [[불교]]계까지도 가세했는데 광주 불교계를 분노하게 한 것은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법회가 열리고 있던 금남로 근처 원각사에 전경 60여명이 '''대웅전까지 난입해서'''[* 단순 예시로 들자면 대웅전이라 하면 집의 거실같은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시위대 진압하겠다고 남의 집 거실까지 처들어가서 최루탄을 터트렸으니 불교계가 조용히 있는게 더 이상할 지경...] 최루탄을 터트리고 학생들을 연행하는 일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비교적 조용함에 따라 청와대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 자신감과 내각 내 온건파의 주장으로 치안 당국은 명동성당 농성자들에게 성당 농성을 중단하면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무사 귀가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며, 농성자들은 찬반 투표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농성을 중단했다. 다행히 치안 당국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판'''이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주말 시위가 소강 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다시 거리로 몰려왔다. 특히 지역의 주요 대학가들은 일제히 6월 15일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고건이 특별히 언급할 정도로 신경썼던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애시당초 광주 대학가가 조용했던 이유는 [[전남대학교]]는 학교 축제로, [[조선대학교]]는 [[조선대학교/역사#s-4|학내 민주화 문제]]로 6월 10일 직후에 시위를 벌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이 끝나자마자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는 항쟁 첫 주에 적극 가담하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가장 격렬하게 항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에서도 명동성당 농성자들이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을 본 학생, 시민들은 정권이 밀리기 시작했다고 인식하며 투쟁에 불을 붙였다. [[6.29 선언]]이 있기까지 12일 동안 매일 150명에서 300명에 가까운 군중들이 광주서현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할 정도로 투쟁은 격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0446968?sid=102|#]] [[이한열]] 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집권세력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 진압하느냐, 아니면 직선제 개헌으로 항복하느냐의 기로에 봉착하여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는데 이날 저녁 청와대 안가에서는 심야 대책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기백(군인)|이기백]] 국방부 장관, 각 군 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자는 전제 아래 출동 준비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2440489|단독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 각하([[전두환]])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광역시|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국가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150만 명의 시민들이 나와있는 상태에서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급의 대규모 진압'''을 벌이려고 한 것. 1980년 5월의 광주와 달리 1987년의 시위는 전국적이었고, 만약 실제로 계엄군을 투입하려 했다면 후술하다시피 '''군 내부에서 [[내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면서 전두환을 설득하여 즉각적인 군 투입은 막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sid2=257&oid=020&aid=0002440489|#]] 6월 19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계엄령으로 군을 투입하든지, 아니면 물러서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군 고위회의가 열렸다. 이는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대 투입 계획을 세밀히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때 [[전두환]]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면서 "이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엄령에 플러스 알파를 하는 '''비상 조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대도 동원할 수 있고 군법 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다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했다. 이에 따라 군대 투입을 통한 무력 진압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이 났으며 수도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충정부대[* [[제17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0기계화보병사단]] 등 서울 주변에 있는 부대로 유사시 시위 진압에 투입될 수 있는 부대. 유사시라는 말에서 알 수 있지만 계엄과 [[쿠데타]] 등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기 때문에 충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89년부터 해당 계획 자체는 '상록수 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9/1781272_19514.html|헌법이 정한 대통령 긴급 명령과 계엄법에 의해 병력 이동을 제한하는 쪽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들을 서울 외곽 지역에 집결시켰다. 당시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 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대를 투입하여 무력 진압으로 소요 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보고하였다. '''어쩌면 5.18 광주를 뛰어넘는 상황이, 그것도 수도 서울 한복판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는 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 당시 경찰력의 대응 능력 한계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서울의 급증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계속해서 소환하여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지방의 경찰력 공백만 불러오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지방의 시위는 서울과 달리 과격성을 띠고 있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상술했듯이 6월 10일 [[마산시|마산]]에서 열린 [[대한민국]] A팀과 [[이집트]] 간의 축구 경기가 [[마산아재|최루 가스 탓에 중단되고 표 환불을 요구하던 관중들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거 시위에 합세하여]] 1,500명이었던 시위대가 3만 5,000명으로 대거 불어났으며 양덕, 자산동[* 양덕동은 [[4.19 혁명]] 당시 허허벌판 논밭이었지만 자산파출소는 [[3.15 의거]] 때도 불탔던 곳으로, '''3.15 의거 때 경찰 발포로 사상자가 난 지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2개 파출소가 전소되었고 민정당 국회의원 [[우병규]]의 사무실이 습격받아 전두환과 우병규의 사진에 대한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327656#cb|화형식이 거행되었다.]] [[파일:external/img.hani.co.kr/00501666_20170607.jpg|width=300]] 또, 순찰차나 전경 버스 같은 경찰 차량, 안기부 직원의 차량, KBS와 MBC의 보도 차량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습격받아 전소되었으나, '''경찰력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해야 했다.''' * 6월 13일 [[부산광역시|부산]]에서는 전방입소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부경대|부산수산대]], [[경성대학교|경성대]] 학생 천여 명이 [[부산역]]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며 연좌 농성을 벌이고, 지나가던 시민들과 대합실에 있던 시민들이 합세해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민들은 인근 상점에서 쭈쭈바를 수십 개씩 사서 시위대 위로 던지며 응원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으로 흩어져 남포동과 서면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 6월 15일, 충청남도 대전시(현 [[대전광역시]])에서는 [[충남대학교|충남대]], [[목원대학교|목원대]], [[한남대학교|한남대]], [[배재대학교|배재대]], [[대전대학교|대전대]] 등에서 학생들이 일제히 교문 봉쇄선 돌파를 시도했고, 병력 대부분을 서울에 차출당한 충남 경찰은 '''모든 학교에서 방어선이 돌파'''당했다. 쏟아져나온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시민들이 대전 도심을 가득 메웠고, 이에 대전 치안당국이 타협안을 제시해 '''[[대전역]]까지의 가두시위를 보장'''하고 진압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6/09/0200000000AKR20170609129200063.HTML|#]] 다른 때 같았으면 협상에 나선 치안당국 책임자가 온건하다며 처벌받을 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 6월 16일, [[부산광역시|부산]]에서는 [[부산대학교|부산대]]생 5천여 명 등 9개 대학생 1만여 명이 비상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시내에서 연합 시위를 벌였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시위대 5천여 명은 충무동 시위대와 합세하면서 남포동 거리를 완전히 뒤덮어버렸고, 시위대는 금방 1만여 명을 넘어섰다. 대중집회를 마친 남포동 시위대는 인근 시청 옆 [[부산MBC]] 방송국으로 향했다. 경찰은 시청 앞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아 차단했다. 경찰 저지선까지 이동한 시위대는 연좌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평화적 연좌시위도 아랑곳 않고 몇 차례 경고방송과 함께 곧바로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진격했다. 흩어진 시위대는 [[국제시장]]과 대청동, 보수동 등지로 나뉘어 시위에 들어갔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폭력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던 소규모 시위대는 경찰 진압에 밀려 영선고개 쪽으로 피하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인근 공사장에서 가져온 철근과 벽돌, 시멘트 포대 따위로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이윽고 몰려온 경찰들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투석전이 벌어졌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은 집요하게 해산을 시도했고,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이 전방위적으로 시위대 해산 작전을 펼치면서 시위대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톨릭센터와 접촉했고, 심각성을 인지한 가톨릭센터가 비상시에 센터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해 피신하고, 가톨릭센터를 항쟁의 중심지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 6월 16일, [[진주시|진주]]에서도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 4곳이 공격받아 불탔고, 전경 병력 주둔지였던 [[한국도로공사]] 진주지사가 공격받았으며 시위대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했다. * 6월 17일, 전날에 이어 시위를 이어가던 진주 [[경상국립대학교|경상대]] 학생들이 남해고속도로로 재차 진입, 도로를 점거하고 '''LP 운반 차량 2대를 탈취하여 폭파 협박을 하며 진주시내 진입을 시도'''해 정촌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초유의 사태에 치안당국도 경악하여 경찰특공대까지 투입, 시위대를 겨우 해산시키고 운반 차량을 재탈환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시위대가 다시 뭉쳐 [[경전선]] 철도를 점거하는 바람에 철도 운행이 일시 중단되었다. [[http://journal-edu.tistory.com/13|#]] * 6월 17일, [[마산시|마산]]에서는 10일에 이은 대규모 시위가 이어져서 산호1파출소, 의창군청[* 의창군은 1995년 도농통합으로 [[마산시]]와 [[창원시]]에 분할 편입돼 폐지됐다.], 노동부 마산사무소(현 고용노동부 창원지청 마산고용센터)가 공격받았고 방범초소가 전소되었다. * 6월 18일, [[부산광역시|부산]]에선 2만여 명의 시위대가 가톨릭센터를 거점으로 집결하여 대청동, 충무동, 남포동 일대를 장악하고 출동한 경찰 병력을 향해 인근 공사장의 철근, 벽돌 등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들은 밤이 되면서 '한열이를 살려내라', '독재타도/호헌철폐' 등지의 4.4조 음률의 구호를 외치며 촛불을 들고 범일동 및 좌천동 고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좌천동 고가 경찰 저지선에서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되는 중에 회사원 [[이태춘]] 씨가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다리 밑으로 떨어져 인근 봉생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 이태춘 씨는 엿새 뒤인 6월 24일에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은 저지선을 뚫어 [[KBS부산방송총국]]을 습격, 화염병을 던져 집기 일부를 파손했으며 밤사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렸다. 이날 서면~범내골 일대에는 30만 명이 운집해 6월 항쟁 최대의 시위가 일어났다. * 6월 18일, [[춘천시|춘천]]에서는 [[강원대학교|강원대]]와 [[한림대학교|한림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 및 시민 1만여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내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며 주요 관공서와 파출소, 방송국 등을 습격했고, 시위가 이어지던 19일 새벽 1시경에는 '''일시적으로 강원도청을 점거'''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몇몇 전경 부대는 접전 중에 진압장비 다수를 빼앗겨 시위대에게 불태워졌고, 경찰 차량 몇 대도 전소되었다.[[http://www.610.or.kr/board/content/page/21/post/576?|#]] * 6월 19일, [[부산광역시|부산]]에서는 10개 대학 및 3개의 전문대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나와 경찰 기동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진압장비를 탈취했으며, 초량파출소, 남포1, 2, 3파출소, 보수1파출소, 부산진파출소 등에 방화하고 집기를 파손했다. * 6월 19일, [[대전광역시|대전시]]에서는 과격 시위대가 탈취한 버스가 [[대전역]] 광장에서 휴식 중이던 충남제2기동대 [[경찰청 의무경찰|전경]] 대열을 덮쳐 전경 1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당했다.[[https://news.joins.com/article/2104603|#]][* 그리고 범인들은 밝혀지지 않아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으며, 오히려 사건 전에 열린 원동4거리 집회 때 버스를 대신 몰던 야채상 허정길이 전경 살해자로 몰려 대전 보안부대로 끌려간 뒤, 충청남도 경찰국, 대전경찰서 등지를 돌며 고문당한 끝에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고, 결국 법원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 집시법 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며 항소와 상고마저 기각되었다. 11년간의 수감 와중에도 억울함을 호소하며 교도소에 집필을 신청했으나 오히려 14곳이나 이감되었고, 1997년 이후 재야단체를 중심으로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8137|석방 요구가 제기되어]]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사면되었다. 다만 모친은 그가 석방하기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고, 석방 후에는 막노동을 하다 2000년 교통사고를 일으켜 2005년까지 또 복역했으며, 이후 화물트럭 운전 등으로 생계를 이어오며 2018년에는 31년 전 사건에 대해 법무부에 진정을 냈다.([[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710219|1999년 <참여사회> 기사]], [[https://vop.co.kr/A00000027228.html|2005년 <민중의소리> 기사]], [[https://m.khan.co.kr/article/200706071812111|2007년 <경향신문> 기사]],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7925|2018년 <오마이뉴스> 기사]])] * 6월 19일, [[청주시|청주]]에서는 [[충북대학교]]생 200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가, [[최루탄]] 파편에 유아가 맞아 다치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서 총 1만 명이 넘는 시위대로 크게 불어났다. 이 기세를 타고 청주시청, 민정당 충북당사, 사직경찰서, [[KBS청주방송총국]], 충청일보사 등에 화염병 및 투석 공격을 감행했다. [[http://www.610.or.kr/board/content/page/14/post/653?|#]] 당시 청주시의 인구는 약 40만 명이니 인구의 2.5%가 시위에 나선 것이다. * 6월 19일, [[충주시|충주]]에서는 [[건국대학교 충주캠퍼스|건대생]] 200여명[* 여담이지만 당시 교통대는 조그마한 규모의 산업대라 시위규모 집계가 안된 듯하다. 규모가 커진건 200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을 포함한 시위대 1천여 명이 가두 시위에 나서며 [[KBS충주방송국]]과 민정당사, 신민당사[* 당시 신한민주당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모두 탈당하고 호헌조치에 찬성하는 세력만이 남아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고, 해당 지역 국회의원 [[이택희]]는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의 중간 배후 중 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 다음해 열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를 내지 못해 해산되었다.], 전신국, 용암파출소 등을 공격했다. 충북 경찰 역시 다수 경찰력이 서울로 차출되고 남은 경찰력 중 다수가 청주에 결집한 상황이어서 고작 1천여 명에게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결국 옆동네인 제천에서 급히 경력을 지원받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http://www.610.or.kr/board/content/page/13/post/657?|#]] * 6월 20일, 19일에 이어 [[청주시|청주]]에서는 연이틀 연속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KBS 차량을 불태우고 석교파출소를 함락(!)시키고 영운파출소를 전소시켰다. 21일에도 다시 시위에 나서서 3일 연속으로 시내로 나아갔고 19일 공격한 KBS 및 충청일보사를 다시 공격했으며 이후 전경들에 밀려 퇴각하는 와중에도 사창파출소를 공격해 불태웠다. [[http://www.610.or.kr/board/content/page/14/post/654?|#]] * 6월 21일, [[부산광역시|부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806명이 연행되었다. 이 시기에 부상자가 속출해 [[부산대학교|부산대]] 의대·치대, [[동아대학교|동아대]] 의대, [[고신대학교|고신대]] 의대 4학년생을 중심으로 진료반을 구성해 남포동 국도극장 앞에 고정 진료소를 설치했고, 이동 진료반도 구성했다. 제약사에서는 약품을 트럭 채로 실어 날라 주기도 했다. *6월 23일, [[제주도]](현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연 3일째 가두시위를 벌인 [[제주대학교]] 학생 7백여명이 제주시내 도심지에서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동반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대생들은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세워져 있던 도로포장용 중기 1대를 밀고 나오고 제주시청 소속 제주7가1050호 지프를 공격해 전복시키기도 했다. 이후 11시 30분께 지난 22일부터 학생 1백여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중앙성당으로 가 합류했다가, 24일 새벽 학교와 성당측의 주선으로 연행학생들이 모두 풀려나오자 농성을 풀고 귀가했다.[* [[파일:제주신문1987.6.24.jpg|width=300px]][br]제주신문 1987년 6월 24일자.] * 6월 26일 [[안양시|안양]]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사와 안양파출소가 공격받아 불에 탔고, 민정당 안양지구당도 마찬가지로 전소되었다. 노동부 안양출장소(현 고용노동부 안양지청)도 사측 편만 든다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시위에 담겨지면서 같이 공격받아 불타올랐다. '''그리고 안양 경찰은 패퇴했다.''' * 6월 26일 [[대구광역시|대구]]에서는 [[명덕역|명덕로터리]] 2.28 기념탑[* 현재는 회전교차로에서 네거리로 변경되었고 로터리 중앙의 2.28 기념탑은 [[두류공원]]으로 이전됐다.]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반월당으로 행진하며 최소 1만여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고, 밤 10시 40분 [[민주정의당|민정당]] 대구 제3지구당([[남구(대구광역시)|남구]], [[수성구]]) [[이치호]] 의원[* [[민주정의당|민정당]] 내에서도 체제수호를 주장하던 강경파였다.] 사무실에 시위 군중들이 난입, 사무실 집기와 유리창 등을 부수고 [[노태우]]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알리는 당보를 길거리에서 불태웠다. 파출소 5곳도 습격받았고 그 중 3곳이 불에 탔다.[[https://m.pressian.com/m/pages/articles/152040#0DKW|#]] 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치안력의 한계는 명백해졌다. 경찰들은 지방에서 공세적 진압을 사실상 포기하고 행정기관 등을 중심으로 한 거점 방어에 치중해야 했으며, 그조차도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급받은 최루탄이 바닥나서 전경들이 시위대와 투석전으로 맞대응하는 상황까지 내몰렸고, 각지에서 경찰 부대가 시위대에 압도되어 퇴각하거나 얌전히 항복한 뒤 무장을 해제당하고 쫓겨나는 일마저 줄이었다. 시위가 워낙 대규모에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보니, 지방의 시위진압 부대들은 어느 한 도시에 머물지 못하고 열심히 버스타고 돌아다니며 이곳 막고 다시 이동해서 저곳 막는 등 땜방을 하고 있었다. 지역마다 민정당사, 도청 및 시군청, KBS 방송국, 파출소 등은 제1 공격대상이 되어 화염병과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6월 13일 [[고건]] 내무부 장관은 전두환에게 서울의 시위는 현재 치안력으로 진압 가능하지만 '''시민들이 경찰이 아닌 시위대에 호응, 동조 및 가담'''하면서 경찰들의 사기가 매우 떨어지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그리고 시위가 확산되면서 경찰들의 체력도,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져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루탄]]'''이 바닥나고 있었다. 경악한 당국은 공장을 풀가동했지만 생산량은 소모량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최루탄까지 바닥난다면, 체력과 사기까지 바닥인 경찰은 맨몸으로는 도저히 시위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통해 구체적인 병력 동원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6월 17일, 작전명령 제87-4호에 의한 병력 동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후방을 담당하는 2군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위수군단 군단장이 지역별 계엄사령관을 맡으며 부산경남지구와 충남북지구를 특히 핵심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또, '''전방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하고''' 특전여단 6개와 해병연대 2개, 그리고 각 군단 직할대인 특공연대 4개를 동원해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 대전, 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에 집중 배치하기로 하였다. 육군참모총장 [[박희도]]는 철도청과 병력 동원을 위한 열차 수송계획의 협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당시 세워진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다. *[[제26기계화보병사단|26사단]], [[제3공수특전여단|3특전여단]], [[대한민국 해병대|해병]] 2개 [[연대(군대)|연대]]를 [[제11군단|11군단]]에 배속 *[[제9보병사단|9사단]]을 [[제9군단|9군단]]에 배속 *[[제7공수특전여단|7]]·[[제11공수특전여단|11특전여단]]을 [[제31보병사단|31사단]]에 배속 *706특공연대를 [[제39보병사단|39사단]]에 배속 *[[제20기계화보병사단|20사단]], [[제30기계화보병사단|30사단]], [[제1공수특전여단|1]]·[[국제평화지원단|5]]·[[제9공수특전여단|9]][[육군특수전사령부/편제|특전여단]], 701·705·[[제708특공연대|708특공연대]]를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에 배속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774|#]] 심지어 [[항공여단]]이나 화학부대도 [[동원]]하려고 하였다. 무력 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시위 지도부는 유혈 사태에 대비하여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